#1 고전의 정의
고전의 정의란 모두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읽지 않은 책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의가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고전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번에 시도할 책은 빨간 머리 앤 시리즈입니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따져보니 그것은 조작된 기억이었지요.
그래서 전자책 구입 목록을 보니 다행히 빨간 머리 앤 시리즈가 전부 있었습니다.
(사고 읽지 않은 책이 너무 많습니다. 사고 또 사는 책도 있구요. 뭐하는 짓인지)
그런데 8권이나 되는 분량에 시작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다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2 빨간 머리 앤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이 책에 생각보다 주옥 같은 명대사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왜 나는 이런 문장이 있었던 것을 몰랐지 라고 스스로 물어보니 읽지 않았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여덟권을 한번에 다 읽고 한꺼번에 기록을 남기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을 뿐더러
8권까지 다 읽으면 1권의 감동이나 기억이 사라질 것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내 기억력은 이제 내 나이와 반비례해서 퇴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때 그 때 기록을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3 애니메이션
처음에 소설의 시작은 레이철 부인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마을 일에 관심 많고 오지랖 부리며 남편도 쥐고 사는 그런 여성.
그런데 처음 부분을 읽으면서 살짝 의아한 부분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책은 읽지 않았지만 내 머리 속에 애니메이션은 본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속에 빨간 머리 앤과 함께 살던 여성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지요.
오지랖은 커녕 너무 조용하다 못해 차가워 보이기 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기억이 그것마저 조작되었나 싶은 마음에 몇 장 더 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해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앤이 같이 살았던 사람은 레이철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마릴라 커스버트 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보면 '그 때 그들의 만남이 운명적이었구나. 정말 대단한 만남의 시작이었구나'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특히 예전 예능이나 드라마의 재방송을 하는 것을 볼 때 지금 대단한 스타들이 저 때 저렇게 만나서 시작 된 것이구나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게 되지요. 신기한 감정에 휩싸이는 느낌입니다. 그 때는 나도 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작중 마릴라와 레이철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이와 비슷한 감탄사가 나왔던 장면이 있습니다.
레이철이 마릴라에게 마릴라의 오라버니인 매슈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릴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아니에요, 어제는 두통이 좀 심했지만 오늘은 아주 좋아요.
매슈 오라버니는 브라이트 리버에 갔어요.
노바스코샤에 있는 고아원에서 사내아이를 데려오기로 했거든요.
그 아이가 오늘 밤 기차로 온다고 했어요.
사내아이를 데리러 갔고, 오늘 밤에 그 사내 아이가 온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생겨 사내 아이 대신에 빨간 머리의 여자아이, 앤이 온다는 사실을. 1권에서 8권까지 이르는 대장정의 이야기가 이 한 줄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감탄사가 나올 법하지 않습니까?
#4 1권에는
빨간 머리 앤은 각 권마다 앤의 삶이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권은 10대 초반
2권은 10대 후반
3권은 20대 초반
4권은 20대 중반
5권은 20대 후반
6권은 30대 중후반
7권은 41세
8권은 40대후반에서 50대 초반까지
여기에 외전격으로 앤의 10대 이전의 이야기, 그리고 앤의 손자까지 등장하는 책까지 존재하니
정말 앤이라는 인물의 수십년의 인생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길고긴 소설을 시작하는 첫 단추가 남자아이를 데려오기로 했어요 라는 잘못 낀 단추였음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러고 보면 삶은 참 이런 일들의 연속인 것 같다. 실수로 끼운 단추같은데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그 단추가 지금까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 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다행이 1권의 내용은 그렇게 어렵거나 낯설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주었던 만화영화와 결이 같아서 그런 것 같다.
#5 초록 지붕 집의 앤
매슈와 마릴라 남매가 같이 살고 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매슈가 농사일을 힘들어하자 남자 아이를 입양하기로 둘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매슈가 고아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지요. 그런데 그곳에는 생전 처음보는 여자 아이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매슈에게 앤이 먼저 말을 겁니다. 분명 생기넘치게 하는 말투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왜 이리 슬프게 들릴까요?
만나 뵙게 되어서 매우 반갑습니다.
저를 데리러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막 걱정하기 시작했거든요.
못 나오시게 될 상황을 수도 없이 상상하고 있었어요.
오늘 밤 아무도 저를 데리러 나오지 않으면 저기 모퉁이에 보이는
커다란 산벚나무에 올라가 밤을 보내기로 마음 먹고 있었거든요.
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달빛이 내리쬐는 밤에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산벚나무 위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대리석 저택에 살고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전 오늘 밤에 절 데리러 나오지 않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꼭 나오시겠거니 믿었거든요.
분명 밝고 아름다운 상상에 나래를 펼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앤의 이 첫마디가 왠지모를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혹 앤은 거절의 연속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내일은 다르겠지라는 희망의 끈을 쥐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아직은 삶을 많이 살지 않아 그 끈이 남아있지만 언젠가 이 끈이 끊어지면
그녀는 더이상 달빛을 즐길 줄도, 산벚나무를 대리석만큼 소중히 할 줄도, 사람을 믿을 줄도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마음은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나봅니다. 이 만남에 분명 착오가 있었음을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는 농사일을 도와줄 남자아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아는 매슈는 그럼에도 앤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앤은 1권에 제목에 등장하는 초록 지붕 집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나 마릴라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고 다시 앤은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처지가 됩니다. 그렇게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앤은 마릴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상상의 이야기가 아닌 진짜 자기 이야기를.
지난 3월에 11살이 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등학교 선생이었으며 결혼 후 어머니는 일을 관두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석 달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그 후 4일만에 아버지도 같은 열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그래서 이웃의 토머스 부인이 맡아 키웠으나 얼마후 토머스 부인의 남편이 죽게 되자 결국 다른 이웃인 하몬드 부인이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 그러나 하몬드 부인의 남편도 죽게 되었고 결국 앤은 고아원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지금 매슈와 마릴라를 만났고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고작 11살이 겪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앤은 자신의 상상 속에 나라에서 살고 있는 듯합니다. 빨간 머리 앤은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기로 유명한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전반부를 읽으면서도 계속 대사가 너무 좋다는 생각을 연신했지요. 이것이 종이 책이라면 먼지하나 묻는 것도 싫어함에도 여기저기 줄을 쳤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러한 주옥같은 명대사는 앤이 현실을 버티기 위해서 만들어낸 보호막 같은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 도중 어느 시점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마릴라의 마음은 바뀌게 되었지요..
앤을 자신이 키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불쌍해서 일까?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매슈가 앤을 키우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아이는 재미있는 아이라고 말하는 장면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런 결정이 일어난 챕터 6의 마지막 부분 마릴라의 독백이 나로 하여금 웃음 짓게 했습니다.
앤에게 여기서 지내게 되었다는 걸 오늘 밤에는 하지 말아야겠어.
너무 흥분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울지도 모르잖아.
마릴라 커스버트, 너도 저 아이가 꽤 좋은 모양이구나.
그렇게 앤은 드디어 1권의 소제목 처럼 초록 지붕 집의 앤이 되었습니다.
앞의 글은 이제 겨우 1권의 오분의 일 정도의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적어놓고 싶은 대사, 내용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면 한권을 다 적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내용이 다 요약되는 것보다 직접 읽어보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내용 요약을 기대하고 왔다면 여기까지만 보고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6 아름다운 책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되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감수성이 있을 때, 소위 세상의 때가 덜 탔을 때 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그만큼 이 책은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하고 애잔함이 흐르기도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러한 감정을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매개체는 상상이었습니다. 1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단어도, 무척이나 자주 등장하는 단어도 [ 상상 ]이었지요. 그것은 앤의 놀이터였습니다. 또한 그 놀이터는 결국 현실을 피하려고 하는 도피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웃기기도 슬프기도 하지요.
한가지 이 책을 보며 안타까웠던 것은 원작을 보기 전에 애니메이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앤을 내가 문장을 통해 구성해야 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 만든 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앤 뿐이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의 얼굴과 몸, 행동이 전부 애니메이션 설정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모습을 스스로 그려보는 즐거움이 엄청난데 이번에는 그것을 놓쳐버렸습니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 빨간 머리 앤 1권 - 초록 지붕 집의 앤 ] 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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