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대넓얕
지인과 이야기하던 중에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 책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른 책장을 찾아 봤지요. 아니나 다를까 책이 책장에 있었습니다. 몇 년전 팟캐스트 지대넓얕에 심취해 있을 때 채사장이라는 저자가 책을 내기만 하면 구입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책들도 제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 너무 좋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가 기대하던 그런 책이 아니었습니다. 간략하면서도 구조를 잡아가는 입문서라기 보다는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를 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분명 읽었음에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몰랐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잘 읽은 책인지 아닌지를 내가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알고 있는 것으로 구별합니다.) 하지만 지인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이 있지는 않았나 싶었습니다. 혹 그 책을 읽을 당시에 시간적 여유나 환경 때문에 급하게 읽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지요. 좋은 책을 그렇게 해서 놓친다면 얼마나 아쉽습니까. 그래서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2 채사장
저자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때 채사장이라는 분은 저자의 글을 정말 잘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저자의 글은 슬며시 넘기는 분들이 많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책들은 이 부분이 시선을 끕니다. 기본적으로 글솜씨가 있으니 가능한 것이겠지만 이 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앞으로 펼쳐질 책에 대해 호기심을 유발하는 저자의 글입니다. 앞선 책들도 다 그랬지요. 그리고 이 책도 그렇습니다. 인디언 추장의 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펼쳐 갑니다.
만약 네가 짐승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파괴한다.
만약 네가 짐승들에게 말을 건다면
짐승들도 너에게 말을 걸 것이다.
그러면 서로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관계에 대해 힘들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도 옆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이야기는 인터넷에만 올리고, 친구는 소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살아갑니다. 정작 직장이나 학교에서 내 속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지요.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도피처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어폰과 스마트폰만 있으면 군중 속에서도 홀로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도피처라고 생각했던 그 도구들은 우리를 더 외롭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얽힌 관계의 실타래를 풀자고 말이지요.
인생의 여정 속에서 닿은 그 어떤 사소한 인연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서 안전게 만나 당신과 나의 내면을 깊고 아름답게 키워낼 것이다.
#3 저자의 세계관
저자의 말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책은 관계에 관한 40개의 짤막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싶은 글도 있고 저자의 삶을 솔직히 적어내서 공감이 되었던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단숨에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왜 내가 관심이 이전의 책들보다 덜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음을 울리기 참 좋은 글이었습니다. 특히나 소년병이야기 연작은 감성을 자극하기에 좋은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바뀌고 상황이 달라졌지만 결말이 동일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보며 멀티 유니버스 또는 윤회적 세계관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붓다에 관한 책을 보며 그 분이 예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또 어떤 일을 했었는지 전생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이 책에서 말하는 관계에 관한 짧은 글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지만 큰 굴레에서 볼 때 돌고 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각자의 이야기들을 별들로 표현하고 그것을 여행하는 것으로 이 책을 읽는 행위를 묘사했는데 혹 이런 세계관에 기초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닌 가 싶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세계관이 제목에서 들어나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책의 마지막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무한의 시간이 지난 먼 훗날의 어느 곳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반갑게 마주할 것이다.
헤어짐도, 망각도, 죽음도, 아쉬운 것은 없다.
우리는 운명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테니,
#4 윤회의 세계
개인적으로 윤회적인 세계관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이 책에서 저자가 이끌어가고자 했던 부분에 잘 안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이야기들은 너무 좋고 지금 나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글들이었지만 그 작은 글의 물줄기가 모여 만드는 큰 흐름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가려는 멈추지 않고 돌고 도는 윤회의 세계관에는 잘 설득이 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책을 재미없게 읽었냐, 아니면 나쁜 책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나와 다른 세계관의 책을 나쁘다 매도하면 이세상에 좋은 책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나와 100퍼센트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까요. 저는 이 책을 보며 40개의 여러 행성을 여행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채사장이라고 하는 하나의 행성을 다녀온 느낌이었지요. 저자는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살아왔기에 앞으로 이런 삶을 꿈꾸는구나 싶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하나의 행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돈이 넘처나서 도무지 쓸 곳을 찾지 못하는 졸부들 중에 어떤 이들은 별을 산다고들 합니다. 평생 가보지도 못할 별을 말이지요. 하지만 저자는 이미 별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별 안에 그가 만들어 놓은 여러 갈래의 물줄기들을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거기에 발을 담글지, 감동해서 같은 모양의 물줄기를 만들지는 독자의 몫이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부럽고 멋진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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